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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9년09월19일 07시20분 ]


2절 유산의 가치
1. 역사성

우리나라에서 해안과 강가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이다. 하지만 신석기시대부터 죽방렴이 시작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해군에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남해군에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서 남해 각지에 분포하는 고인돌 유적들은 남해읍 심천리, 남해읍 평현리, 봉성리, 이동면 다정리, 창선면 당항리, 서면 대정리, 서면 서호리, 남면 오리 등으로 남해의 여러 곳에 분포하지만 죽방렴이 위치한 곳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들이 곧 죽방렴을 제작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어렵다.
이 뿐만 아니라 죽방렴 설치 제작에는 반드시 뗏목이나 선박과 같은 운반 시설이 필요하며 인간의 지혜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당시의 기술로 죽방렴을 제작했다고 볼 수는 없다. 죽방렴의 원형이 언제부터 갖춰졌으며 이를 이용해 고기를 산 채로 잡게 됐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으며 단지 사료에 의해 추측할 수밖에 없다.
선사시대부터 어로는 매우 중요한 생활수단의 하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작살류에 의한 자돌어업이 행해졌고, 흙으로 만든 어망추를 사용하고 뼈바늘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어망도 사용됐을 것이다. 그 후 삼국시대에는 낚시도 행해졌고 어량을 통해 어업을 행했음을 다음의 사료에 의해 살펴볼 수 있다.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에서 “탈해가 처음에는 낚시업을 생업으로 삼아 그의 부모를 봉양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에 위나라에 면포와 해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며, 백제본기5, 법왕 원년에 법왕은 불교를 혹신하여 “겨울 12월에 살생을 금하고 어렵도구를 불태우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어량을 바탕으로 어망을 치고 어업을 행했으며, 어량과 비슷한 어살을 치고 고기를 잡았음이 다음의 기사들로 전해진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3권 잡속2에는 “고기잡이는 썰물이 질 때에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되, 그물은 잘 만들지 못하여 다만 성긴 천으로 고기를 거르므로 힘을 쓰기는 많이 하나 공을 보는 것은 적다. 다만 굴과 대합들은 조수가 빠져도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이 줍되 힘을 합하여 이를 주워도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는 정교하지는 않더라도 그물눈이 큰 그물을 사용해 고기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제6권 세가 정종 9년에는 “내가 어질지 못하여 이러한 가뭄을 초래하였고 재변이 거듭되는 것이다. 상식국으로 하여금 매 사냥꾼을 해산하게 하는 동시에 어살을 치고 고기 잡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어살어업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어살이 더욱 활발해 어량과 어전, 어살이라는 용어가 조선왕조실록과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상당히 많이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참조해 조사한 표에 의하면 어량 수가 가장 많은 도는 충청도이며(136개), 이어서 황해도(127개), 전라도(50개), 경기도(34개), 경상도(7개), 함길도(2개)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서 경상도 7개 속에 남해현의 죽방렴과 관계있는 어량이 나타나며,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경상도에 어량이 있는 군현의 수가 41개소나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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