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어업 유산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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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업 유산의 가치
  • 한국수산경제신문
  • 승인 2019.05.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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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개요
제주도에서는 언제부터 무호흡으로 잠수해 수산물을 채취했을까? 전복과 소라를 비롯한 조개류가 가장 많이 발굴된 상모리 패총의 연대를 볼 때, 제주도에서 조개류를 채취한 것은 기원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잠수해 채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의 ‘수산업법 시행령’은 나잠어업을 ‘산소 공급 장치 없이 잠수한 후 낫, 호미, 칼 등을 사용해 패류, 해조류 그 밖의 정착성 수산 동식물을 포획·채취하는 어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현재의 해녀처럼 무호흡으로 잠수해 수산물을 채취하는 나잠어업자는 17세기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제주도 관련 기록에만 등장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제주도에만 해녀가 있었을까? 조선시대 각 지방의 토산품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해녀들이 주로 채취하는 미역, 소라, 전복 등은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 여러 해안지방의 토산품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어떻게 채취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해안가에서는 가장 깊은 물속에 있는 전복도 잠수를 하지 않고 채취할 수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까지 해녀는 한국에서 제주도에만 있었다고 추측된다.


제주 해녀 등장 배경
제주도에는 17세기 말까지 남성 나잠어업자인 포작(鮑作)이 있었다. 남자인 포작은 주로 깊은 바다에서 전복을 따고, 여자인 잠녀는 비교적 얕은 바다에서 미역과 청각 같은 해조류를 채취했다. 그러나 19세기 초가 되면, 여자가 물질을 전담하게 된다. 왜 여자만 물질을 하게 됐을까? 남녀유별의 유교적 가치관으로 인해 관(官)이 남녀가 같이 물질을 하지 못하도록 명령한 것일까? 속옷 차림으로 물질을 하는 모습이 선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물질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자는 신체적 특성이 남자보다 물질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여자만 물질을 하게 된 것일까?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찬물에서 견딜 수 있는 능력은 더 뛰어나다. 아니면 과중한 공납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도망을 가는 포작을 대신해 아내인 잠녀가 공납을 떠맡게 된 것일까?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잠녀가 포작을 대신해 전복을 따서 공납하게 됨에 따라 여자가 물질을 전담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주 해녀는 공납제적 생산양식의 잠녀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여성 나잠어업자이다. 제주 해녀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직업 집단으로 등장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은 일본어로 출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바깥 물질’이다. 해조업자들이 제주도로 건너와 해녀들을 일정기간, 일정한 임금으로 고용해 한반도 동남해안 연안의 해조류를 채취하기 시작한 것은 1895년이다. 영남의 방어진이나 포항은 1883년경부터 일본의 이세(伊勢) 아마(海女)의 어장이었다. 제주 해녀가 진출하자 일본 아마의 진출이 점차 줄어들다가 1929년 이후 이곳에서 일본 아마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왜 그랬을까?
일본의 이세 아마들은 배를 타고 나가 빨리 잠수하기 위해 13kg의 추를 매단 밧줄을 이용했다. 아마가 물 위로 떠오를 때에도 배 위의 사공(주로 남편)이 밧줄을 끌어당긴다. 이 밧줄을 일본어로 이노치즈나, 즉 생명줄이라고 부른다.
제주 해녀들은 박으로(현재는 스티로폼) 만든 ‘테왁’의 부력을 이용해 그 위에 가슴을 얹고 해안에서부터 멀리까지 헤엄쳐 나간 뒤, 자기대로 잠수한다. 따라서 제주 해녀는 밧줄을 끌어주는 사공이 필요 없어, 일본 아마보다 노동생산성이 높았다.
<자료 제공=수협중앙회 수산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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