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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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소총
  • 한국수산경제신문
  • 승인 2019.01.0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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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듣기 좋은 소리 (喜聽裙聲)
송강 정철(鄭澈:1536∼1593)과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어느 날 교외에서 손님을 전송하기 위해 서로 약속을 하고 나갔다.
옛날에는 지방 관직을 맡아 떠나거나 낙향하게 되면 작별하는 날 떠나가는 쪽 도성 밖 교외에 차일을 쳐서 미리 자리를 마련한뒤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마련해 와서 대접을 하고 작별하는 전송 행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백사 이항복(李恒福:1566∼1618)과 일송 심희수(沈喜壽:1548∼1622) 월사 이정구(李廷龜:1564∼1635)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술이 몇 바퀴 돌아 모두들 얼큰해지니 한 사람이 제안을 했다.
“우리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짧은 글귀를 짓되 그 내용을 가장 품위 있고 듣기 좋은 소리로 읊어 보도록 합시다.”
이에 송강 정철이 나서서
‘淸宵朗月 樓頭알雲聲 (청소낭월 누두알운성):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의 머리를 비추는데 이를 가리며 지나가는
구름 소리’라고 읊으며 이 소리가 가장 좋다고 했다.
이어 일송 심희수가 받아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읊었다.
내 그보다 더 고상하고 좋은 소리를 나타내 보겠으니 어디 한번 들어 보시오.
‘滿山紅樹 風前猿嘯聲 (만산홍수 풍전원소성):
온 산 가득 찬 붉은 단풍에 바람 앞을 스쳐 울리는
원숭이의 휘파람 소리 이 소리야말로 절품이 아니겠소?’
그러자 서애 유성룡이 은은한 목소리로
‘曉窓睡餘 小槽酒滴聲 (효창수여 소조주적성):
새벽 창 잠결에 들리는 작은 통에 술 거르는 소리’라고
읊으며 이 소리가 더 매력적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때 월사 이정구가 받더니
‘山間草堂 才子詠詩聲(산간초당 재자영시성):
산골 마을 초당에 도련님 시 읊는 낭랑한 그 목소리’라고 읊자 마지막까지 듣고 있던 백사 이항복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들려준 그 소리도 모두 좋기는 한데 아마도 내 지금 읊는 이 소리만은 못할 것이요. 한번 들어 보시지요.’
하고는 목청을 가다듬어 이렇게 읊었다.
‘洞房良銷 佳人解裙聲 (동방양소 가인해군성):
깊숙한 방안 좋은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이에 모두들 그 소리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한바탕 크게 웃었더라 한다.

이름 있는 선비가 모욕을 당하다 (名士受辱)
어느 이름 있는 선비가 마침 남쪽 지방으로 여행할 일이 있어, 한강의 동작(銅雀) 나루에 이르렀다. 마침 배가 나루에 닿아 있어 선비는 배에 올라타고, 사공을 재촉하여 배를 띄우게 했다.
그런데 배가 막 나루에서 떠나 한 발 정도 나아갔을 때, 한 무인이 말을 타고 달려와 떠나가는 배의 사공을 부르는 것이었다.
"사공! 내 갈 길이 바쁘니 배를 멈춰 함께 타고 가도록 합시다."
이 소리에 사공은 앞으로 나아가던 배를 멈추고, 다시 뒤로 저어 나루에 닿게 하려고 했다.
이 때 배에 타고 있던 그 선비는 사공을 꾸짖어 말했다.
"이미 나루를 떠난 배를 왜 다시 뒤로 돌린단 말이냐?"
그러자 사공이 멈칫 하고 있는데, 그 사이 무인은 타고 있는 말을 채찍질하여 배 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선비를 보고 화를 내면서 꾸짖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배가 나루에서 멀지 않은데, 함께 건너는 게 무엇이 나쁘다고 그리 못하게 합니까? 천하에 썩은 선비들이 하는 일은 모두 이렇게 편협하단 말입니까?'
이에 선비는 비록 화가 치밀었으나, 배 안에서 용맹한 무인에게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그저 속만 끓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무인이 필시 글을 모를 테니, 내 글로써 제압하리라.'
이렇게 마음먹고 선비는 말을 타고 있는 무인에게 말했다.
"오늘 날씨도 좋고 한강 풍경도 아름다우니, 시나 한번 지어 보는 게 어떨는지요? 내 운자(韻字)를 불러 볼 테니 시 한 수 지어 보겠습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어디 운자를 불러 보시지요."
무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응수하니, 선비는 곧 '변(邊)'자를 불러 주었다.
이에 무인은 이런 시를 지었다.
淸江淸兮白鷗邊 푸른 강물 맑은데 백구 노니는 강변이여(청강청혜백구변)
白鷗白兮淸江邊 백구는 희디희고 강변은 푸르구나.(백구백혜청강변)
淸江不厭白鷗白 푸른 강이 백구의 흰빛을 싫다고 아니하니(청강불염백구백)
白鷗長在淸江邊 백구는 오래도록 푸른 강변에 있도다.(백구장재청강변).

이에 선비는 그 상대가 되는 시구를 생각하느라 고심을 하는데, 배가 벌써 남쪽 나루에 닿았다. 그러자 무인은 먼저 내리더니 말없이 떠나갔다.
선비는 무안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여, 종자를 시켜 그 무인이 사는 곳과 성명을 물어 오라고 했다. 이에 무인은 선비의 종자를 보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 상전에게 일러다오. 나는 본시 시골에 사는 무인이고 양반 선비가 아니니라.
내 비록 네 상전인 선비와 연락을 하고 교분을 가진들, 어찌 서로 평등하게 사귈 수 있겠느냐? 그러니 내가 사는 곳이나 성명을 알려줘 봐야 별 의미가 없느니라.'
무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표연히 떠나가 버렸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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